까만 밤이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만치 공장이나 가건물에서 삐져 나오는 불빛이 있고 달빛과 간간히 하늘에 박혀있는 별빛이 보태어 그래도 주위의 형체를 구별할 정도는 된다.
그런 밤에 들길을 걸었다. 처음 가 본 길인데다가 밤이었고 훗날 다시 걷고 싶을 때를 대비해 기억 속에 저장해 둘 어떤 단서도 있지 않는 그냥 허허 들판 길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 달빛과 별빛밖에 없는 시공 속을 걸었던 사람들은 정말 까만 밤을 걸었겠다.
길을 나서자 왁자지껄한 개구리 소리가 이 곳이 물이 많은 곳임을 알려주었다.
몇인지 짐작할 수 없이 많은 무리는 각각 자신에게 입력된 생체주기에 맞추어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행위를 하며 저마다의 파열음으로 허공에다 자기의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낮 동안 내린 비 때문에 논에는 찰랑찰랑 물이 넘치고 있었다. 그 물에 달빛이 비추이니 그 반짝임은 두텁고 고요함 또한 점잖다. 콧 속으로 들어오고 뺨을 어루만져 주는 밤 공기의 촉촉한 선선함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우리가 걷는 길은 분명 물기가 있는 듯 질척거렸다.
허허 벌판 길을 선사님 뒤를 따라 갔다. 늘 그랬던 것 처럼 선사님께서 주시는 법문을 토시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며 뒤쳐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밟으면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 차진 물체와 물컹한 물체를 자주 밟게 되었다. 처음 몇 번은 그냥 걸었는데 몇 발짝 떼지 않아 자꾸 반복되니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쇠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발자국 떼기가 조심스럽고 기분이 찝찝했다. 보이지 않으므로 그 동안 내 몸의 감각이나 학습으로 알게 되어 축척된 그 잡다한 지식으로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농촌생활의 경험이 전혀 없는 나는 문자만으로 학습한 몇 안 되는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보이지 않으니 미리 피할 수도 없어 나도 모르게 밟아야 하는 이 찐득하고 물컹거리는 실체가 무언지 알아내고 싶었다. 선사님 말씀도 놓치면 안되겠고 실체를 알아 그 물체가 주는 불쾌함에서도 벗어나고 싶은 두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얼마를 걷다가 나는 쇠똥일거라 생각하고 찝찝해 하던 그것이 쇠똥이 아니라 어쩌면 농부의 경운기에 실려 가다가 떨어진 그냥 흙덩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원효대사 생각이 났다. 원효대사가 누구신가? 친구인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우연히 들러 밤을 지낸 곳에서 목이 말라 시원하게 마신 물이 해골 속에 있던 썩은 물이었음을 알고 모든 것은 결국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분, 그 길로 조국인 신라로 돌아와 귀족불교에 맞서 우리나라 불교의 대중화를 주도한 각자(覺者),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시던가? 내가 그 물체를 대뜸 쇠똥이라 단정했던 까닭은 우리가 있는 월영루 바로 앞에 젖소를 키우는 목장에서 들려오는 굵은 바리톤의 소 울음소리와 간간이 바람 속에 묻어오는 쇠똥 냄새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들'은 소가 논을 갈고 밭을 가는 영상과 항상 같이 하니 이 둘을 조합하여 내 머리는 그 정체를 쇠똥이라 답을 내린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나는 그 물체가 쇠똥인지 그냥 단순한 진흙인지 확실히 모른다. 다만 돌아와 밝은 불빛 아래서 본 신발에는 차진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고 쇠똥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이 쇠똥인지 진흙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보다 나는 내 오감이 작동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의 알량한 머릿 속 지식 나부랑이의 무능함과 허약함을 보았고 그것이 통하지 않는 상황의 생소함에 당황하였을 뿐이다. 천리만리 먼 타국도 아니고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 살고 있는 주소지와 자동차로 불과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이웃일 뿐인데 처음 와 본 곳이고 햇빛이 달빛과 별빛을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참으로 한계가 뚜렷하다. 오감과 문자로 알게 된 지식은 그것이 작동하지 못하거나 단서를 주지 않는 상황이 오면 전혀 쓸모없고 무능한 참으로 믿지 못할 것들이다. 물론 내가 가진 지식의 양이 많지 않음이 더욱 이런 한계를 빨리 알게 되는 첫째 이유이기는 하겠지만.....

해 아래서든 달이나 별 아래서든 내가 익숙한 곳이든 그렇지 않은 곳이든 관계없이 두루 통할 수 있는 것은 근원(根源), 근본(根本)으로 가는 것 그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처처가 부처고 도량이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아 근원으로 다가가는 공부하기를 내 일상의 가장 우선에 두고 멈춤없이 계속 공부를 지어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겠다. 결국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