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프로그램 ‘청소년마음동산가꾸기’ 중등 셋째날.
선원으로 가는 길 가에는 가을바람에 떨어진 가로수의 낙엽이 곳곳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놓아야 함을 나무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추운 겨울을 잘 견디고 새 봄이면 다시 주어지는 새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놓고 비우고 버려야 한다. 동트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고 나무가 나뭇잎을 보내야 하는 때는 그 나뭇잎이 가장 아름다움 빛깔로 물들여지는 때이다.
선원에 도착하니 김혜경 교장선생님이 먼저 도착한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언제 뵈어도 책임감과 성실함이 몸에 배인 분이다. 곧 중·고등학교 시험기간이 다가와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시작 시간이 아직 10분 정도 남았으니 이 정도면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란한 검은 머리통들 사이에 얼핏 금발머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시 보니 분명 금발이었다. ‘아, 김정숙 선생님 반의 그 아이구나.’ 짐작이 되었다.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는 어려운 환경이지만 이제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그 아이였다.
꼭 저 나이였을 때, 내게도 금발머리의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막 입학한 중학교는 언니 오빠 하나없는 얼뜨기 신입생에게는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과목마다 선생님이 바뀌는 것도 그렇고, 음악실, 미술실, 과학실이 따로 있어서 그 과목은 그 교실을 찾아가서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고, 월요일 아침이면 2, 3학년 선배언니들이 교문 앞에서 머리길이, 복장검사를 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리고 우리 반 옆 반에는 금발의 아이가 있었다. 지금은 글로벌시대고 국민소득도 높아져서 외국으로 나가는 일도 자유롭고 외국인을 보는 것은 더구나 별스런 일이 아니지만 30년도 더 전에는 외국인을 보는 일이 드물었고 더구나 외국인 아이를 보는 것은 더 드물 때였다. 전형적인 금발머리 백인 아이가 나와 같은 학교, 같은 선생님과 공부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같은 반은 아니다보니 부딪히거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 짝에게 옆 반에 외국아이 있는 것을 봤느냐고 했더니 의외로 내 짝은 그 아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고 집도 같은 동네라고 했다.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빠는 미국으로 가고 엄마는 한국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한국인 동생도 낳아 살고 있고 이 아이와는 별로 왕래가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아이는 착한 이모와 함께 살고 있고, 그 착한 이모가 정말 얘한테 잘 해주지만 이모 말을 잘 안 들어 이모를 힘들게 한다는 것, 덧붙여 어른들 말은 아빠와는 전혀 연락이 없는데 그 아이는 친구들에게 곧 아빠가 있는 미국으로 갈 거라 한다’는 비교적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쪽 눈의 속눈썹과 눈두덩이가 새하얀, 그 때 나로서는 처음 보는 백납이라는 병을 앓고 있던 내 짝은 열네 살답지 않게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어느 날 병원에 가야 되기 때문에 조퇴한다고 말하던 짝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앓고 있는 백납이라는 병의 증세와 전에는 얼굴에 하얀 부분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 조금만 더 치료하면 다 나을 거라면서 자기의 병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을 많이 하신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얘기해 주었던 짝 때문에 그 아이에 대해 어느 정도 신비감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 전체에서 실시하는 학급환경심사인가 뭔가 때문에 일요일에 반 친구들 몇몇이 교실꾸미기를 하러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 우리 반만 온 줄 알았는데 옆 반 아이들도 와 있었고 그 중에 그 금발의 아이도 있었다. 짝을 통해서 궁금함은 풀렸지만 그 아이와 자연스럽게 왔다갔다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날 나는 교실꾸미기보다는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더 열중했던 것 같다. 그 일요일 이후 나와 그 아이는 자주 복도에서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우리집에 놀러오기도 했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조금씩 사이가 소원해졌고 결국 별로 사귐이 없었던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보이지 않아 물어보았더니 전학을 갔다고 했다.
외국인이니 태어나면서 원래 영어는 잘 할 거라 단정(斷定)했는데 영어는 못하고 나처럼 그냥 한국말만 하던 그 아이의 이름도, 꿋꿋하고 어른스러웠던 짝의 이름도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살면서 혹시 길에서 스쳐 지나갔던 적이 있었다면 세월 속에서 서로 너무나 변해버린 모습을 알아보지 못해서였든지 아니면 이미 끝난 인연이라 다시 엮일 수 없어서 였을까? 그들과의 인연은 정말 30년도 더 넘게 까맣게 잊고 지냈던 옛날이야기인데 마치 얼마 전의 일인 듯 실패에 잘 감아놓은 실타래처럼 솔솔 잘 풀려 나옴이 또 신기하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호기심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그 친구를 나또한 그런 시선으로 대했음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철없던 어린 시절의 유치함에 대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꼭 말하고 싶다.
오늘 만난 금발의 친구는 발우공양도 잘하고 젓가락질도 바르게 한다고 프로그램에 참석한 여러 어른들이 대견해 하였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삶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마냥 좋고 마냥 밝기만 한 사람은 삶에 뭔가 2%쯤 부족한 것 아닐까?
‘빛이 다(모두)’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빛만 가면 무조건 밝아지니 모든 것이 다 빛의 아래이고, 빛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면서 빛도 어둠의 저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둠을 극복해낸 사람, 빛도, 행복도 어둠과 불행의 저 편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사람, 그래서 만상에 드나듦이 자유로운 사람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임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 세상에는 어둠도 빛처럼 똑같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된다.
※가명을 쓰면 될 것을 굳이 신체적 특징(금발)으로 지칭한 것은 저의 감각이 가장 먼저 구별한 ‘다름 (異)’이 그것이었고 그것은 이 글의 내용을 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져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수용(收用)과 조화(造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