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많이 뜨겁다.
하지만 반도의 중부와 남부가 확연히 달라 수도권을 위시한 중부지방은 장마로 연일 비가 내리고 반면에 남부는 푹푹 찌는 더위로 숨쉬기도 곤란한 지경이다.
하필이면 이렇게 무더운 남도에서 더더욱 무더운 여름을 보낸다.
그동안 여름을 잘 보냈건만 갑자기 백팔십도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니 몸이 힘들었나보다. 아랫입술 윗입술이 다 들고 일어나버렸다.
어리석어서.. 제 갈길 못 찾고 방황하며 살다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남들 잘 안하는 일들을 하려니 고달프다. 이건 뭐 자신에게 하는 투정인 셈인데 어찌 미리미리 안했던고 후회막급이다. 

오늘은 일요일.
모처럼만에 여유가 있어 ‘능엄경’을 손에 들고 지역도서관에 아침부터 자리 잡고 앉았다. 지난 서울선원에서의 법회 때 선사님께서 능엄경을 시간 나는 대로 다시 정독해보라고 하셨던 말씀을 따라 마음을 내었다.

예전에 법문을 들으며 읽어 내려간 능엄경은 아, 그거..! 고개가 끄덕여지는 깨달음의 시간이었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 내려가는 능엄경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선사님께서 법문하셨던 내용도 생각이 나고 연필로 해석을 달아놓은 글귀도 도움이 되어 진도가 앞으로 잘 나간다. 처음 접했을 때 몇 장 보다가는 ‘아이고 뭔 말씀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하고 포기했었던 상황하곤 확실히 다르다.

그러다가 능엄경 130쪽에 도달해서 책갈피 속에 있던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인연’과 ‘시절인연’의 차이에 대한 의문을 선사님께 여쭤보려고 적어놓았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선사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그 의문은 저절로 해소 되어 질문 드리지 않았다. 

능엄경 ‘인연이란 무엇인가’에서 부처님은 “보리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선사님께서도 “인연은 빚 청산을 못해서 과보를 받는 것으로 지혜는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지는 ‘처음 발심할 때의 중요한 두 가지 생각’에서 부처님은 보리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연을 끊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제 모습을 나타내는 것‘, ‘네가 다만 세간에 업장과 과보 그리고 중생, 이 세 종류가 서로 연속되는 것을 따라 분별하지 아니하면 세 가지 인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곧 너의 마음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은 자연 사라질 것이다.’ 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기독교 성경 요한복음에 집나간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나는 어릴 때 성경에서 이 내용을 보면서 참 멋진 비유라는 생각을 했었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속에 여의주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미처 알지 못해서 타향에서 곤궁하게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가난하긴 하지만 여의주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여의주를 가르쳐 주면 마음속에 기원하던 대로 큰 부자가 되리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 신비로운 여의주가 밖에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으리라.’

선사님께서는 ‘시절인연이 닿아야 깨달음을 얻고 보살의 길을 걷는다.’고 하셨다.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 그 여의주를 가르쳐 주는 인연이 바로 시절인연이고 이런 시절인연은 무수한 세월동안의 공덕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만나는 복락일진데 ‘인연’과 ‘시절인연’ 이 말은 비슷한데 그 의미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어리석고 우매한 내가 선사님을 만나서 이치를 배워 나감은 시절인연이 닿은 까닭인데 과거의 나에게 무슨 공덕이 있어서 이렇듯 넘치는 복을 누리는 것일까.

사람들은 부처님을 뵈어도 그분이 부처님인 줄 모르고 자기생각, 자기 고집으로 악습을 고치지 않는다. 부처님이 함께 살고계신 시대에도 그러하거늘 부처님이 아니 계신 시대에야 얼마나 혼탁하고 어지러울까. 

직장 동료 중에 열심히 불교를 ‘믿는 이’가 있다. 그는 예전에 승려경험도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늘 독경을 듣고 다니며 어떤 일에 맞닥뜨리면 꼭 승려가 말하듯이 말한다. 이를테면 “다 인연 따라 되는 것이다.” 라든지 누가 아프다면 “마음이 병들어서 그렇다. 마음만 비우면 된다.”라는 식이다. 한번은 그에게 “당신, 마음이 뭔지 아나?”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뭘 따져, 그냥 비우면 되지..” 그런다.

나는 그에게 “불교는 믿는게 아니라 깨닫는 거 아닌가? 당신이 불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하는데 당신이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소리 같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화를 내고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기도가 어쩌고 지장보살, 천수보살, 관음보살 등등 여러 보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경배해야한다는 등.. 뭐 그런 독경이 다 있나 싶다. 

나는 그를 알고 나서야 한국불교의 만연한 수행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마음, 마음 읊고 다니면서 진정 공부마음은 내지 않고 술 먹고 담배 피며 자신의 몸을 청정하게 관리 할 생각도 못 내고 그러면서 스스로는 불제자라고 여긴다. 경전만 달달 외우고 물음표 없이 맹신하는 불제자가 있던가? 

능엄경 136쪽에 부처님 말씀이 ‘네가 지금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 것으로 하여금 멀리 여래의 상常.락樂.아我.정淨과 계합하기를 바라거든 먼저 마땅히 나고 죽는 근본부터 골라 버리고, 나고 죽지 않는 맑고 원만한 성품에 의해서 이룩해야 하느니라. 맑음으로써 허망하게 났다, 죽었다 하는 것을 돌이키고 이를 항복 받아 본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명각命覺인 나고 죽음이 없는 성품을 얻어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은 다음에야 과지果地를 닦아 증득함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흐린 물을 맑게 할 적에 고요한 그릇에 담아서 흔들리지 않게 오래 두면 모래와 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맑은 물만이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처음으로 객진번뇌를 항복 받았다고 이름 할 것이요 섞임을 버리고 순수한 물만 남게 한 것과 같은 근본무명을 영원히 끊었다고 이름 할 수 있으니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면 일체가 변하여 나타나도 번뇌가 되지 않아서 모두가 열반의 깨끗하고 오묘한 덕과 부합하느니라.’

선사님께서는 “번뇌가 곧 지혜다”라고 하셨는데 바로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면 일체가 변하여 나타나도 번뇌가 되지 않아서-’라고 한 내용과 부합되는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상常.락樂.아我.정淨은 내게는 또 새로운 내용이라서 역시 공부할게 많다는 걸 느낀다.
이렇게 어려운 공부일진데 그래도 선사님의 법문을 생각하며 다시 읽는 경전은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이 새록새록 하여 참 좋다. 

언제나 진리를 밝혀주시고 사표가 되어 주시는 선사님께 항상하는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옵니다. 주시는 곶감만 빼먹는 못난 제자 되지 않게 열심히 애쓰며 살겠습니다.  

2013년 7월의 세 번째 일요일에 향원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