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마지막날 경담, 보정, 나 이렇게 세명이서 이른아침에 표충사 앞에 당도 하였다. 두 친구도반들은 이곳이 이미 여러번 왔던 곳이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우곡선사님께서 최초로 불연이 닿았던 곳, 사자암과 거기까지 오르내리셨던 길을 직접 걸어 올라가 보는 것을 만행의 목적으로 하였다.
아침에 우리가 도착하였을때는 박무가 산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해가 뜨면서 그 안개들이 하늘로 빨려들 듯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절경이어서 내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선사님이 쓰신 책 '놓고 비우고 버리기'에 보면 당시 삶에 회의가 가득하셨고 육신의 병마저 깊어 이곳에서 삶을 마감하려 하셨다는데 그 당시에 선사님께서 짚차로 아슬아슬 하게 오르내리신 길, 그 길은 표충사 입구에서 옆길로 빠져야 하나 우리는 그 빠지는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나중에 내려와서야 아, 이 길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우리는 매표소를 통과하여 표충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표충사 경내를 한바퀴 휘 둘러본 다음 표충사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가로질러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리곤 곧 그 산길도 벗어나서 샛길로 목적했던 도로에 들어섰다.

나는 원래 불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부처님 정법을 만났다는 게 기이하다.
처음에 친구로부터 우곡선원을 소개받을땐 종교 또는 불교로 소개받지 않았다.
단지 마음의 힘을 길러 세상에 끄달리지 않는 법을 체득하는 심신수행단체로 소개받았다.
친구의 권면이 내게 좋은 이미지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한 말들이 당시 가지고 있던 종교를 막 졸업할려고 하였던 나의 내면의 상태와 딱 맞는 내용이었고 게다가 처음듣는 마음수행에 관한 것들이 그럴수도 있겠다 하는 어느정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음이다.
그러다가 몇년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발심하는 계기가 있었을때 친구따라 장에 간다는 심정으로 스스럼 없이 우곡선원 선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내게 남아있던 종교의 잔재를 털어 버리는 데 몇년의 세월과 마음의 고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로는 좁지만 시멘트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왼쪽 비탈에는 허리까지 오는 높이로 안전대을 쳐 놓았다. 올라갈수록 길은 구불구불 협소해졌다. 예전엔 이 길이 짚차라야 겨우 아슬아슬하게 올라갈 수 있는 산길이었다는 거다.
자칫하면 왼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아주 위험한 길이었을텐데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서 다행이 위험해 뵈지 않았다.
그런길이 계속 이어지다 마침내 깊은 낭떠러지와 면한 데에까지 이르렀다.
경치는 그지 없이 좋았다. 그러나 한발만 더 내디디면 형체도 남지않고 저세상으로 갈 수 있는 정말 아찔한 절벽이었다.
아..이곳이 바로 그곳이구나. 책에서 읽은 내용을 되세기면서 내려다 본 절벽, 저 아래 깊은 계곡에선 산 정상부위에서 부터 꽂히듯 큰 폭포를 지나 물줄기가 힘차게 흘려 내려갔다.
그 경관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경담거사의 재촉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 길에서 뱀을 만났다.
참개구리도 만났다.
참개구리는 물 웅덩이에서 우릴 보고 도망도 가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얘네들은 목숨 보전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경담거사는 어릴적 뱀 머리를 꼭 쥐고는 마을 뒷산을 제집처럼 의기양양하게 다녔었다. 참개구리는 잡아서 구워먹으면 그 고소한 맛이 일품인데 문경 그 깊은 산골마을에서 자란 보정거사가 그런 개구리를 보고 잡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린 이미 그런 시절을 다 보낸 사람들이다.
뱀을 제갈길로 보내고 개구리에게도 작별을 하고 산을 오르는 발걸음은 한결 여유있고 즐거웠다.

한참을 올라 마침내 고사리분교에 다다랐다.
하지만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고사리마을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분교역시 그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오른쪽으론 잡목이 우거졌고 고사리마을이 있던 자리 역시도 군데군데 잡목이 들어서 이곳에 사자평이라는 이름이 더이상 어울리지 않겠다 싶다.
선사님의 책에서도 고사리마을과 사자평 너른 들판을 사실적으로 묘사 해 놓으셨는데 과거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빽빽한 밀림,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억새군락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겠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고사리마을 앞 길따라 재약산 올라가는 곳에 길게 드리워진 플랭카드엔 사자평 복구작업을 진행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내용에 신뢰가 가지 않는것이 억새군락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온통 도토리나무나 이름을 잘 모르는 잡목들이 산의 대부분을 점령하였고 키도 상당히 자라 플랭카드가 무색하였기 때문이다.

길따라 좀 더 올라가니 과연 밀양시에서 억새군락을 복원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나타나긴 하였다.
이곳 역시도 자연의 침식작용으로 산이 갈라지고 있었던가 본데 시에서 그렇게 갈라진 데를 바위와 흙으로 메워 등산로를 내면서 길 따라 한쪽으로 억새풀을 인위적으로 심어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목적지인 사자암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
등산로가 새로 포장되었고 숲이 우거져서 예전의 모습과 너무 달라진 탓이다.
경담과 보정 두 친구들은 육년전 마지막 왔을때랑 너무나 다른 모습에 많이 당황해했으나 다행히 크게 헤매지 않고 사자암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사자암이 있던 자리는 이미 오래전에 철거가 되서 블럭잔해와 스레트지붕 조각만 쌓여있어 완전한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 곳이 선사님께서 처음으로 불법을 들으시고 한동안 머무르셨던 장소였다니 너무 허전하고 아쉬움이 남아 자꾸만 눈이 갔다. 형편이 된다면 암자를 원형그대로 복원하여 보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지만 지금으로선 부질없다.

사자암 뒤로 용바위가 있다.
이 용바위에 앉으면 사자평 너른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는데 이젠 잡목이 우거져 억새 군락은 그 자리를 보존하기가 궁색한 지경이다. 궁색하나마나 우린 그 자리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름은 높고 윙윙거리는 벌레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차츰 마음을 비워 깔고앉은 바위와 하나가 되고 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과도 하나되고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이름모를 풀꽃과도 하나되었다. 아니 하나 될려고 애썼다.
마음을 비우는게..그게 그처럼 쉬운 일은 아닌 걸, 다만 애를 쓰다 보면 어느때 어느날엔가는 될것이라 확신한다. 이미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맛을 본듯도 한데 아무때나 마음먹은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것,

우리는 잠시후에 길이 끊어진 곳을 찾고 있었다.
나로선 초행길이니 그져 앞선 두 도반들의 안내를 따라 갈 뿐이다.
그러나 선사님께서 유서를 쓰시다가 노보살님을 만났다는 끊어진 길, 그 장소는 찾지 못했다.
길은 끊어지지 않았고 정상으로 계속 이어졌으며 새로 깔아놓은 등산로길이 옛길을 지워 버려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층층폭포가 장관이었다.

폭포 위 맑은 계곡물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멱도 감고 바위에 턱 하니 앉아서 좌선도 하고 다행이 추석 바로 다음날이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우릴 방해할 눈이 없었다.
선사님께선 당시에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길이었는데 우린 이렇듯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행복한 장소가 되어 있었으니 죄송스럽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어두워져 가는 길을 재촉해 내려오며 마음 가득 합장하여 부처님께 삼귀의 합니다.
이 생에 만난 부처님, 이 기이한 만행에 이끌어 주심을 감사하옵니다.
부지런히 닦아서 중생의 때 벗기를 발원하오니 끝까지 인도하여 주옵소서.

난생 처음으로 와 본 재약산과 사자평,
가슴이 탁 트이는 이 대자연 속에서 행복한 하루를 보냈음에 나의 온 생애가 헛되지 않았다 여겨져 한없이 기쁘다.
못나게도 살고 조그마한 걸 성취 해 본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대자연 속에 마음을 비우고 동화되는 시간만큼 거룩하고 가치있는 시간은 없었던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