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과의 전쟁 -
1. 無明, 行 그리고 識
바다를 연해서 펼쳐진 초원에서, 소 떼들이 이른 봄 짧은 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묵묵히 풀을 뜯고 있다. 누런 황소 두 녀석은 물 통 근처에서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밀치면서 장난을 치고 있고, 갈가마귀와 흰 꼬마 새들은 겁도 없이 소들의 가랑이 사이를 누비며 모이를 툭툭 쪼아먹고 있다.
노 신사 한 사람이 족제비를 닮은 작고 암팡스레 생긴 누렁이를 데리고 마주 걸어오고 있다. 누렁이는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보자, 그만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납게 공격 시늉을 한다.
“허허, 대인은 말없이 묵묵한데, 용렬한 자는 지레 겁을 먹고서 저리 요란하게 공갈을 치는구나.”
바로 그 때 누렁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지레 겁을 먹고 허둥거리고 있지?
지금까지 해 본적이 없는 “나라는 생각”에 누렁이 자신도 깜짝 놀랐지만, 그 “나라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황소들은 왜 저렇게 크고, 나는 왜 이렇게 왜소하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으므로 큰 것이 있다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그래 맞아, 일단 내 몸이 크고 봐야 하는 거야!”………(無明)
“오늘 이 순간부터 내 몸을 저 황소보다 더 크게 키울 꺼야!”………(行)
누렁이의 대반란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날부터 누렁이는 자기 몸을 키워가기에 불철주야로 매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세포 수를 늘리고 집 크기도 늘리고 울타리도 튼튼하게 보수하고………(識)
누렁이는 자기만의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겠다고 스스로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누렁이의 이러한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황소의 첩보에 따라 동네 사람들은 누렁이의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검사하기 시작하였다.
혈액검사, 초음파검사, 방사선 동위원소를 이용한 스캔검사, 흡인세포 및 조직검사……
누렁이는 유두암이라는 國號로 갑상선 주변에 약14mm 반경 크기의 자기 왕국을 기히 축조했으며 약 4~5명의 전령들을 임파주변까지 파견하여 그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음이 밝혀졌다.
지금의 이 누렁이(암세포)는 옛날 황소들과 사이 좋게 함께 살았던 그 누렁이(나의 정상세포)가 아니고, 자기의 왕국건설 이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완전한 귀머거리 상태로 변해 있었다. (주: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함께 살지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지극히 我相에 젖은, DNA변형에 따른 돌연변이 세포다)
누렁이(암세포)를 위해서는 동네 사람들(나의 정상세포)이 모두 물러나 주어야 하고,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는 누렁이가 물러날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이었다. 설득이나 이해의 정도를 넘어선 상태 즉 악성종양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누렁이 사이의 전쟁 즉 나와 암과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 6入에서 生死까지
누렁이는 우선 자기가 가장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충복들인 눈, 귀, 코, 혀, 몸, 뜻 등 6명의 정보 장교들을 모두 출동 시켰다………(6入)
누렁이의 장교들은 동네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名色)을 밀착 감시(觸)하고 또 수집한 정보들을 수시로 보고(受)하는 긴박한 상황이 진행되었다.
첫번째 중대정보가 접수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4월 26일 갑상선과 임파선 곽청수술을 계획하고 있다는 엄청난 첩보였다.
누렁이는 누렁이 왕국의 전국민들에게 총 동원령을 발령하였다.
누렁이 왕국의 국민들이여, 누렁이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을 치르자!!!
그러나 첫번째 전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대형 포크레인으로 누렁이 황궁을 통째로 파서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누렁이는 짹! 소리도 못하고 그냥 당하고 말았다.
정말 심한 불평등 전쟁이었다, 미국과 알 카에다 사이의 전쟁처럼…………..
성대 마비로 목소리가 쉬고, 땀샘 신경계통 손상에 따른 왼쪽 안면 근육감각장애, 어깨근육의 부분적인 마비, 엄청난 피로감의 엄습 등 동네 사람들의 후유증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은 일시적인 어려움일 뿐, 약3~4개월의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인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렁이 왕국이 완전히 소멸되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동네 사람들도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국 사람들이 동굴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알 카에다 잔당들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염려하고 있듯이………
누렁이 왕국에 두번째 중대정보가 전달되었다.
8월 27일에 핵 폭탄 투하 즉 방사성 요오드 다량 투여를 결정하였다는 정보였다.
보고되는 정보의 성격에 따라 누렁이의 표정은 노랗게, 파랗게 그리고 하얗게 수시로 변화하고 있었다.………(愛)
누렁이 또한 최후의 결전을 선포하였다.………(取)
“황소보다 작은 몸으로 사느니, 차라리 우리는 모두 죽음을 택하겠다!!!”
누렁이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는 허탈감에 빠진 누렁이 왕국의 남은 식구들에게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동기가 되었다.………(有)
갑자기 누렁이 왕국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生)
와!! 와!!! 누렁이 왕국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주: 갑상선 암세포는 요오드를 섭취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수술 후 방사성 요오드를 다량 투여하면 암세포가 파괴된다. 갑상선 호르몬 복용을 약 4~6주 동안 끊은 상태에서 즉 갑상선 기능이 저하되어 “갑상선 자극 호르몬이 최대로 활성화된 상태”에서 방사성 요오드를 투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8월 27일 16시50분 약150mCi 용량의 핵 폭탄이 일시에 투하되었다!!!
방사성 요오드가 투여된 이후 2~3일 동안은 갑상선 주위의 목이 붓고 입안이 마르며, 전신이 나른하고, 침샘이 부어 침이 잘 나오지 않는 등 동네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안겨 주었지만, 핵 폭탄을 맞은 누렁이는 거의 의식을 잃고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졌다.……(老)
누렁이 왕국은 거의 폐허상태로 변해 있었다.………(死)
주) 방사성 치료 후 방사성 요오드를 이용한 전신촬영을 통해 암 재발 가능성과 전이 여부를 검사한다.
3. 에필로그
"한 생각이 일으킨 허물"로 빚어진 동네 사람들과 누렁이 사이의 전쟁은 이렇게 끝나는 듯 보였지만………
이번에는 허벅지 화농성 종기 분화구에서 열흘째 피고름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뒤돌아 바라보니, 무수히 많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누렁이의 모습을 하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들이다. 모두가 一體同根 이었다.
이 전쟁은 유위의 전쟁이 아닌 무위의 전쟁 즉 마음의 전쟁이었다.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싸우지 않아도 되는 지혜에 스스로 안주하는 도리밖에 없다.
다음으로, 그런 지혜에 안주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깨닫는 도리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동요하는 일도 없고, 생기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는 절대고요와 함께 하는 도리밖에 없다.
다시 그 절대고요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成住壞空하는 自然의 攝理에 몰록 함몰되는 도리밖에 없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내 마음의 돌을 갈고, 갈고 또 갈아서………
먼지 입자보다 더 잘게 갈아서………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 나는 내 역할에 더욱 더 충실해야지.”
이것이 이 전쟁에서 내가 획득한 유일한 전리품이다.
주) 이상은 2002년 3월부터 2002년 8월 사이 나와 암세포가 싸우고 있는 동안의 내면세계 에너지 흐름을 누렁이와 동네 사람들로 의인화하여 12연기로 표현해 본 이야기다.
주) 12연기 : 세상의 온갖 미혹은 모두 아집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아집을 없앤다면 미혹의 상태는 사라진다. 마음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아에 집착하고 무지에 가려져서(無明), 오직 불합리한 사고방식을 따라 활동해 나간다(行). 먼저 그 마음에서 주관·객관이 생기고(識), 그것에 이어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기관 작용이 일어난다(6入). 다시 그것으로부터 대상과의 접촉이 생기고(觸), 그로 말미암아 감수작용이 일어난다(受). 감수작용에서 애욕이 일어나고(愛), 그것 때문에 집착이 강해진다(取). 이렇게 하여 우리의 생존이 영위되고(有), 색수상행식의 5온이 발생한다(生). 이윽고 5온은 쇠미해 져서(老), 마침내 소멸한다(死). 이런 쇠미 소멸로부터 격렬한 고뇌가 일어난다. 그리고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근심이 집중해 생기게 되는 것이다.(華嚴經 十地品. 現前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