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근본 실천 행
이름 : 圓明 작성일 : 200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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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의 문에 들어가고자 하면 어떤 실천행이 중요합니까? 하고 대주선사에게 물었다. "단1)바라밀2) 즉 보시행이 근본실천 행이다"라고 대주선사는 답한다. 보시는 여섯 바라밀 중에 하나일 뿐이다. 몰록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면 왜 보시(모든 것을 남들에게 베풀고 주는 것)만이 중요한 실천 행이란 말인가? 계율도 지키고 인욕도 하고 정진도 그리고 선정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어떤 연유에서 육바라밀 중에 단지 하나인 보시바라밀의 실천행을 통해 몰록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무슨 물건을 보시한다는 말입니까?"하고 되 집어 묻는다.

대주선사께서는 보시 바라밀 하나에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면 무엇을 보시하는 것이기에 이 보시라고 하는 하나의 실천행이 나머지 다섯 가지 보살행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단 말인가? 진정한 보시란 무엇을 의미하나?

일반적으로 보시하면 재물을 보시하는 것이라든지 불법을 전하는 것쯤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대주선사는 진정한 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布施却二性]이라고 정의한다. 두 가지 성품이라고 하면 있음과 없음, 사랑함과 미워함, 공(空)과 공 아님 등 우리의 인식작용을 통해 밖의 대상을 구분 짓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만물을 대상으로 구분 짓는 성품을 버리고 이 세상 만물이 모두 의지할 것 없는 공(空)이기에 베풀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체득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얻는 것이 곧 진정한 보시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두 가지 성품을 모두 버림으로서 자성청정심을 얻었다는 생각조차도 버리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생각을 내게되면 그 순간 그는 이미 "나"라고 하는 아상을 낸 것이 되어 진정한 의미의 보시 행과는 십만 팔천리로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진정한 보시는 나와 밖에 대상을 정해 놓고 내가 밖의 대상에 무엇인가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시는 나를 닦아 다시 말해 중생심에 묶여있는 자신을 닦아 자성청정에 이르는 것이다. 나를 닦아 두 가지 성품을 버리고 진정으로 여여한 평상심을 얻게되면, 때와 장소에 가장 적합한 말과 행동이 가능해지고 그러한 언행이 바로 진정한 보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곡이 말하는 리발(理發) 기발(氣發)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아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나를 없애면 바른 하늘의 이치가 드러난다. 이것이 理發이다. 이와 같이 바른 이치가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것에 따라 기운이 움직여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생명을 살리는 보시가 된다. 이것이 氣發이다. 일체의 모든 상을 없애 버리면 바른 이치가 드러나고[理發] 따라서 만물에 자비를 베푸는 모든 부처의 생으로 거듭남[氣發]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3)

그러면 보시행 하나로 어떻게 다른 여섯가지 바라밀을 다 구족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익경에 따르면 "보시는 일체의 번뇌를 버림을 의미함이요, 지계는 일체 만물의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요, 인욕(忍辱)은 나를 가다듬어 어떠한 일에도 마음 상(傷)해 하지 않는 것이요, 정진은 일체 만물에 분별 상을 떠나는 것이요, 선정은 일체 만물 어느 곳에도 집착함[無所住]이 없는 것이요, 지혜는 희론(戱論)이 없음 즉, 더 이상 허구적 망상이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여섯 가지 보살행을 다시 정리해보면 첫째는 버림이요, 둘째는 흔들리지 않음이요, 셋째는 성내지 않음이요, 넷째는 분별 상을 떠남이요, 다섯째는 묶임이 없는 것이요 여섯째는 무명에서 벗어남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가르는 분별심을 버리고 보시행을 하게되면, 우리는 중심 잡힌 흔들림 없는 삶[持戒], 어떠한 일에도 마음 상해하지 않는 삶[忍辱], 모든 마음속에 출몰하는 어지러운 번뇌 망상을 닦아 늘 여여하고 담연한 삶[精進], 일체 만물 어디에도 묶임이 없는 자유로운 삶[禪定], 그리고 세상 근본이치를 꿰뚫고 행할 바를 행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삶[知慧]을 함께 구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시의 바른 뜻을 내 삶 속에 구현하는 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기본 실천행이요 육바라밀 행이다.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세우고  남들을 도와주고, 오계를 지키고, 인욕하고 선정을 닦아야 하고 계속 정진을 해야 한다는 식의 구분과 행위는 헛농사 짓는 일이다. 왜냐하면 앞세운 문구가 아무리 절묘한 의미를 담고 있어도 그것은 이미 나라고 하는 것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른 수행은 문자에 묶이지 말아야 한다. 나열한 여섯 가지 실천 행을 통해 몰록 깨달음에 이르겠다고 몸부림치면 치는 만큼 내가 계율을 지켰다는 생각, 정진했다는 생각, 선정을 닦았다는 앞생각에 묶여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육바라밀의 언구에 묶이지 않고 시비, 손익, 애증 등 양변에 묶인 마음을 모두 놓고 비우고 버리고 나면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고, 살면서 마음 상할 일도 없으며, 스스로 분별 상을 짓고 그 상에 묶이며, 허구적 존재논리에 끄달려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결론은 하나이다. 돈오에 이르는 가장 근본적 실천행은 버림이다. 끝없이 출몰하는 분별심을 버리고 나면 드디어 참 생명의 세계가 열린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옥토를 조성할 때 그치지 않는 희열과 무한한 창조적 삶이 열려지게 된다.

인욕 하겠다는 마음, 정진하겠다는 마음, 선정을 닦겠다는 마음,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앞선 마음과 옛 사람 가르침에 묶여있는 그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놓고 버리는 것이 진정한 보시행이다. 그 길만이 자연질서에 영원히 함몰된 자아(自我), 깨달음의 길에 동참된 참나[無我]를 재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여기서 단(檀)이라고 하는 의미는 인도의 '다나' 즉 보시(布施)를 의미하는 것을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2) 바라밀은 行이나 고통의 바다를 건너감을 의미하는 度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실천행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3) 이 말은 금강경에 이일체제상(離一切諸相)이 즉명제불(卽名諸佛)이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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