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說法)이란 무엇인가
이름 : 圓明 작성일 : 2001-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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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인터넷을 통해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고승들이나 큰스님들의 설법을 들을 수 있어서 좋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늘 다른 사람들이나 매스컴을 통해 접하던 당대의 큰 수행자들을 직접 화면을 통해 접할 수 있어서 좋고, 두 번째는 그분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해들을 수 있어서 좋고, 세 번째는 그 동안 단지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그 분들의 진면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서 좋다. 이제 세상은 정말 밝아졌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투명사회가 되었다. 허명(虛名)으로 또는 몇 년 동안 어떻게 수행을 했다는 겉껍데기를 통해 일반 대중들을 눈속임할 수 있는 시대는 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불교계를 이끌어 가시는 스님들의 설법을 접하면서 진정한 설법의 의미를 되새긴다.

돈오입도요문에 대주 혜해선사에게 금강경에 "설할 법이 없음이 법을 설함(無法可說이 是名可說)"은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대목이 있다. 대주 선사의 설명에 의하면 "설할 법이 없다"고함은 우리의 욕심에 묶인 작은 나 즉, 소아(小我)가 완전히 사라지고 진여 청정에 이르러 하늘 마음과 하나된 대아(大我)로 거듭나면 내가 무너진 무아(無我)의 삶에 접하니 아무것도 얻고 버릴 것이 없으며, 그러한 삶 속에는 시비를 가리는 분별심도 없고, 일 순간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바가 없어 이렇다 저렇다고 설할 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법을 설함(說法)"이라고 함은 대아로 거듭나면 자유자재이며 원융무애이기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어느 것도 알지 못함이 없다. 삶 그대로가 자비이고 말과 행동 자체가 빛이며 소금이니 곧 그것이 법을 설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아로 거듭난 스승의 삶을 통해 진정한 진리를 볼 수 있고 그의 삶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적현본(開迹顯本)이요 즉유증무(卽有증無)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개적(開迹)이라는 말은 방편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현본(顯本)이라고 함은 본체를 들어낸다는 의미다. 즉 방편을 통해 그 본체를 들어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즉유(卽有)라고 함은 곧 밖으로 들어 난 현상을 말하며 증무(증無)라고 함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입증한다는 의미이다. 즉 밖에 들어 난 현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여의 세계를 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진여의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단지 방편을 통해 그 면모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승의 삶을 통해서 진리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말과 행실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인천(人天)의 스승으로 거듭난 선지식의 삶 그 자체가 진정한 설법이다. 우리는 단지 스승을 통해 그 높은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자취를 통해서만 그 숭고한 진여의 본체를 알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은 영원성을 가지며 인류역사가 다하도록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설법이다.

그러니 진정한 설법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지식의 조각을 꿰어 맞추고, 경전의 몇 구절을 들먹이며 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설법은 인욕에 묶인 내가 없어지고 자연 질서와 하나가 된 이후 생각(正思惟)과 말(正語)과 행동(正業)과 그리고 삶(正命) 그 자체가 다 설법이 된다. 진여자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자기의 생각을 개입시키는 순간 끝이다. 진정한 진여자성의 표현은 단지 삶의 흔적을 통해 가능해진다. 대 자유와 육근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숭고한 삶을 통해서 단지 그 세계를 들어낼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말이 있다. 그 때 그 장소에서 아무런 자기의 주장 없이 작용하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번뇌에 묶이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진정한 부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두려움과 앞생각들을 놓아버리고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 딱 들어맞게 무심의 경지에서 떠오르는 생각 그것이 부처의  마음이고 있는 그대로 간절하게 살아감이 곧 부처의 행이다. 지식으로 통해 이해하려하고, 남의 말을 끌어다가 꿰어 맞추고자 방황하니 자기 것이 안나온다. 중요한 것은 자기 농사짓기다. 믿음과 철저한 확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설법이다. 달리 더 소중한 설법은 없는 것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인욕 속에서 가슴앓이 하는 작은 나로부터 벗어나 대아로 거듭나서 자연질서와 하나되어 우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1)「우주를 자기 것으로 등기하고 이 땅에 스쳐 가는 과객의 입장에서 주인으로 거듭나야한다. 주인이 나타나면 과객들은 다 자리를 비워주게 되어있다.」 주인된 삶 그것이 높은 세계요 자유의 세계요 그 삶의 흔적이 곧 바른 설법인 것이다.

이 시대의 바른 스승 그리고 중생을 일깨우는 사자후가 그립다. 그렇지만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현대 문명의 이기는 우리들에게 투명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옥석을 가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습이나 허명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설법을 내 삶으로 끌어 들여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1) 이 구절은 3월 26일 우곡선사님의 돈오입도요문 강설에서 설법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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