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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서쪽이 원래 정해져 있지 않다는 禪師님의 직설법에 용기를 내어 돈요입도요문論 제 2강 禪定과 無住處 그리고 無住心을 내가 서있는 이 자리의 의미로 정리하였습니다.
1. 선정(禪定: 참된 삶의 휴식과 평화)
인간의 근본인 마음을 어떻게 닦을 수 있을까? 대주 혜해스님은 좌선을 통해 얻는 선정을 권하고 있는데 그것은 근본 마음을 닦는 지름길이 선정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문경에도 모든 삶의 참된 거룩한 지혜는 선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이르고 있고, 선정에 이르는 마음이 없으면 모든 잡념들이 한없이 들끓어 우리의 거룩한 지혜의 작용을 흩으러 놓는다고 일러주고 있다. 그렇다면 선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禪이라고 함은 끊임없이 출몰하는 망념이 끊어지고 마음이 깊이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과거 생으로부터 축적된 자신의 심층의식 속에서 작용하는 미세 망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으로써 참된 삶과 휴식, 마음의 평화를 얻음을 선이라 할 수 있으며, 定이라고 함은 지속적으로 변화무쌍하게 다가오는 모든 연기적 현상에서 흔들림 없는 無心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내적으로 완성된 힘을 갖춘 것으로 "소가 닭을 쳐다보듯이 닥쳐오는 변화의 물결에 무심히 대처할 수 있는 힘이 定이다." 定은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뒤흔드는 이로움과 해로움, 헐뜯음과 높이 받들음, 칭찬함과 비웃음, 그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8가지 세속풍랑에 끄달림 없는 오롯한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선정의 마음을 닦으면 그 힘으로 일상의 삶 속에서 선정이 농익을 수 있으며 이와 같이 여여한 마음이면 누구든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성불한다고 함은 자신이 어떤 변화를 통해 특별한 신통력과 형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찌그러진 모습그대로, 보편적인 생활 속에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성인의 경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못생기면 못생긴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참된 삶의 휴식과 평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바깥 경계에 동요됨 없이 여여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부처의 삶이고 중심 잡힌 선정의 생활화라고 혜해스님은 일러주고 있다.
선정에 이른 사람들의 삶 속에는 내적 큰 힘을 가지게 된다. 어떠한 변화에도 초연할 수 있는 힘,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늘 마음 깊은 곳에 평화를 유지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고 일념으로 수행한다. 근세에 일어난 한 예로 대영 제국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맨 주먹으로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간디처럼,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소에 흔들림 없이 큰 지혜를 그의 삶 속에 여실하게 들어냄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들을 감복시키고 그들이 스스로 쫓아오도록 하는 무량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선정의 힘으로 볼 수 있다. 또 많은 사람의 시기와 질투, 비판과 오해 속에서도 오직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主一無適]으로 좌절 늪에서 신음하는 병사들을 일으켜 세우고 몇 척 안 되는 배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처럼 선정은 우리를 무량력(無量力)의 보살로 거듭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선정은 서있는 그 자리, 즉 8風이 휘몰아치는 삶의 현장에서 지혜와 자비로 자신을 장엄하며 끊임없는 힘으로 회광반조된다. 2. 머무름이 없는 곳[無住處]과 머무름이 없는 마음[無住心]
개인의 삶을 살펴보면 우리는 대부분 어느 곳인가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有住處]. 어떤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려고 모든 시간을 허비한다. 그의 삶은 재물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 돈, 정력을 소비한다. 그는 권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혹자는 가정이나 자신의 일은 다 팽개치고 친구를 돕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특정한 종교 집단이나 단체 활동에 정신이 팔려 부모 자식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승진에 미쳐 있는 사람, 일에 미쳐 있는 사람 모두 어느 한곳에 머물고 매달려 있는 인생이 중생의 삶이다.
내면적 측면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무상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선정에 이르러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또 어떤 이는 절대자에 기대여 하늘나라에 가겠다고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혀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대상이나 내적인 기준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힘을 줄 수 있는지는 깊이 있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대상에 붙잡혀 머무름에 일시적인 평안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상으로 지은 것은 반드시 무너지기 때문에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것은 중심 잡힌 삶이 아닌 반쪽 짜리 삶을 전부로 본 것에 불과하다. 혜해스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머물 곳은 아무 곳도 없다고[無住處] 말한다. 즉 우리의 머물 곳은 우리가 잡고 있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린 그 자리가 곧 머물 곳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잡고 있어야 편하다고 생각하는 일체의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그 심리적 공간[處]에서 진정한 자유와 가능성을 맛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애철수(懸崖撤手), 이는 김구선생이 윤봉길 의사에게 써준 글이다. 만약 네가 민족 앞에 잡고 있는 모든 것을 놓으면 너는 민족의 품안에 떨어져 진정한 삶의 의미를 구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준 글귀이다. 절벽의 나무 가지 하나를 잡고 매달려 있으면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부둥치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우리가 잡고 있는 것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같이 불안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잡고 있는 모든 것을 놓고 대 자연의 무한한 참 질서인 순리의 세계에 자신을 내맡겨진 삶이 무주처(無住處)인 것이다.
이즈음에서 임제스님의 살불살조(殺佛殺祖)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기대해왔던 부처다 조사다 할 것 없이 모든 바램과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져야한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올곧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자신인 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걸림 없는 삶이 가능한 것이다. 잡고있던 것을 놓고 버리고 자연의 질서와 하나가 되고 나면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가 된다. 하늘마음 안에 있는 달이 빛나듯 우리는 우주의 질서 속에서 우리의 참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얻은 마음의 작용이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머무는 바 없는 마음[無住心]은 때와 장소에 맞는 일을 가장 정확하게 일호의 낭비도 없이 할 수 있는 마음이다. 당연(當然)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어진다는 것이다. 당연한 삶은 졸리면 당연히 자고 배고프면 당연히 밥 먹고 피곤하면 당연히 쉬는 지극히 당연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은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부처의 마음, 곧 무주심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색깔, 모습, 오탁(汚濁)도 없다. 새로 낳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늘 깊이 잠기여 항상 고요하고 어디에도 묶임 없이 여여(湛然)하다. 부처는 모습이나 그 음성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작용으로 들어 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으면서 시공간에 가장 적절하게 당연하게 작용하는 것이 진여자성이며 곧 부처의 마음이다.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마음, 창의적 마음이 곧 무주심(無住心)이요 부처의 본래 몸[佛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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