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하여
이름 : 如意心 작성일 : 200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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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에 대한 믿음과 변화

우리는 '변화(變化)'라는 화두(話頭)를 안고 살아간다. 그 변화는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하고, 보다 안전한 삶을 향한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사고에 익숙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낯익은 환경이 제공하는 안락에 취해 다가오는 변화의 기미를 외면해 버리던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애써 피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내가 살아온 동안 몇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중의 하나를 여기 옮기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안주(安住)'라는 감미로운 유혹과 험난하게 여겨지는 '변화(變化)'의 현장을 선(禪) 수행을 통해 고찰하고 그 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우곡선원과 인연을 맺으면서 놓고, 비우고, 버리는 마음 공부를 지어가게 된 것은 아주 특별한 변화가 되었다. 언제였던가 다보수련원 정진법회 때 선사님의 '존재'에 대한 한마디 물음은 새삼 가슴속에 모든 의문이 열려지는 듯한 강한 메세지를 받았다. 존재라는 덩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듯하면서도 참으로 설명해 질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실존? + 알파? 실존이란 말만 입에서 맴돌 뿐 그 이상의 것이 분명 있는데 잡히질 않았다. 무위 세계라는 존재의 절반을 그땐 정녕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이는 형상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인 실상계의 절반이 합친 것이 존재라는 참 의미를 누군들 쉽게 알 수 있었을까? 그때이후 엄연히 존재했건만 알지 못했던 무위법계의 실상과 그 존재의 인정은 알음알이에 갇혀 지내던 내 생각이 많은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무명(無明)에 가려져 전혀 알지 못했던 절반의 존재세계를 이해케 됨으로 큰 인식의 변화를 느꼈던 우곡선원에서의 참선 수행을 여기 풀어놓는다.

2. 무명에 가려진 自我

인간의 삶은 욕구라는 지향성을 가진 에너지와 욕구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무명으로 인해 만들어진 허구적 존재인 '나' 즉, 自我라는 것이 자신이 좋아하고 탐하는 것들을 갖고, 취하고, 집착하면서 어쩔 수 없이 또 하나의 인과를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할 때 다가온 현실은 자신의 뜻과는 어긋나게되고 삶은 점점 고통스러워지게 된다. 이것은 무명(無明)에 둘러 쌓인 자아(自我)가 연기법계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형상을 취하고 집착하고자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즉. 이 세상 모든 실체는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모든 형상은 무상하여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그 어떠한 현상도 변화의 과정에 나타난 일시적인 모습일 뿐 영원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도 법계의 연기과정에 나타난 하나의 일시적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모든 물체는 무아(無我)이다. 하지만 깨닫지 못할 때는 인간은 自我가 있다는 허구적인 자각에 빠져 연기의 과정에 나타난 형상을 대상화하여 집착하고 취하려고 한다.
인생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초로와 같지 않은가! 이 찰나의 시간에 '나'라고 하는 자아, 그리고 내 것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실체에 집착한다면 끝없이 변화하는 형상계에 끄달려 다니는 괴로움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하루빨리 무명에 가려진 자아를 벗고 육근에 집착한 분별심에서 벗어나 일시적 형상에 불과한 허구적 존재에 연연하지 않는 본래의 '나'자리를 찾아가는 바른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

3.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전체는 부분과 같고 부분은 전체와 같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니고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다.
수행은 이원성을 넘어선 하나의 자리 그 곳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깨달음이란 하나된 그 곳에서 걸림없이 사는 모습이다. 둘이 아닌 하나의 자리, 깨달음의 그 자리가 바로 본래의 나의 자리이며 나의 모습이다. 시·공간마저도 포함한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해서 연기(緣起)하는 것이며 색(色)으로 드러나 영원한 것처럼 여겨지는 무정물(無情物)도 불변이 아니다. 자성(自性)이 아닌 것은 그 어떤 형상도 연기하는 과정이며 무자성공(無自性空) 혹은 공성(空性)인 것이다.
본시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이며 변화하는 연기의 과정에 나타난 일시적 형상일 뿐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세세간 쌓아놓은 업(業)과 업의 필연적인 결과인 보(報)에 의해 인연과 화합하여 유위법계에 나타난 일시적 형상일 뿐이다. 진정한 나란 없는 것이며 우주 전체인 것이다.

4. 우리가 가야 할 삶의 방향

(1) 올바른 자각
참 본성이 자신을 밝혀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본 성품이 바깥 세상에 대한 관념이나 헛된 사념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無明]. 세상의 모든 사물은 모두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 본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와 마음을 맑게 하면 '나'라는 것도 '남'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2) 수용하는 마음으로 만상과 조화를 이룬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내가 받는 고통은 세세간 또는 금생에서의 지은 업보이고 그 업보의 결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그러한 고(苦)는 누구 때문도 아니고 내 스스로 자초한 결과임을 이해하게 되면서 주어진 상황들을 초연히 받아들이려 한다.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면 만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3) 허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 그때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지나가도록 여여해 져야 할 것이며, 분별로 인하여 잃지 않으려고 집착하여 더 많은 업을 쌓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 그 자체는 얻었다고 늘어 날 것도, 잃었다고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4) 일념(一念)으로 살아간다.
일념이 흐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상황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한 힘은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거나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행(行)이 잘 여물어 진다면 결국 서로간에 편리한 세상을 만드는데 협력하는 길이 될 것이다.

(5) 불법(佛法)을 토대로 예(禮)와 덕(德)을 쌓는다.
인간은 예를 바탕으로 살아 갈 때 참 오롯한 인생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견해나 의욕에 끄달리지 않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떠나서는 영원한 행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禮와 德을 잘 겸비하는 것이 완전한 인간이 되는 깨달음의 조건이며, 이러한 이치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해탈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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