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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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若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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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0-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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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정관념의 실상
우리가 수행을 지어감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될 것 중의 하나는 '인식'이 '지식'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어떤 생각이나 사물로부터 비춰지는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하나의 지식으로 긁어 모아 육근의 창고에 저장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인식은 대다수 고정관념으로 자리잡는 과정이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지식은 결론적 작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지식이라는 창을 통하여 밖을 바라보고 결론을 내리려 한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지식의 창을 통하여 인식한 것들을 기반으로 의식체계를 형성시킨다. 의식은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객관적 지식전달 체계인 경전이나 타인의 체험을 통해서도 인식되고 형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여기 장미꽃이 있다고 하자. 그대가 한 송이 장미꽃을 처음 보는 순간 그대는 순수의식을 통하여 형용할 수 없는 환희와 신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꽃과의 진한 교감을 통하여 부드러운 향기와 모양과 색깔 등 장미의 아름다움을 체감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하여 희열을 경험할 수도 있다. 즉, 한 송이 장미를 통하여 심취 감을 맛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는 좋다 싫다 판단하고 평가 할 수 있는 지식이 동원될 여지는 없다. 그러나 곧 장미의 향기와 모양 색깔 등, 조금 전의 장미에 대한 지식을 긁어 모은다. 이러한 경험 이후 그 옆의 장미꽃을 보는 순간에는 첫 번째의 경험과 같은 진한 감동이나 환희심은 많이 줄어들 것이며 세 번째, 네 번째… 장미꽃을 볼 때는 환희심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같은 책을 거듭 읽거나 똑같은 영화를 반복하여 보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귀착될 것이다.
왜 우리는 두 번째 장미를 보는 순간부터 처음과 같은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처음 마주한 장미에 대한 앞선 지식을 통하여 다음 장미꽃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습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식은 순수의식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을 인식하고 그것이 앞선 지식으로 떠오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기억의 창고에서 지식을 지워야 합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장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개의 장미는 각각 다른 최선을 다한 생존을 이어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통해서 장미를 바라보면 두개의 세상을 자신의 주관적 견해에 집어넣어 하나로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선사님은 참선 법회가 끝날때면 오늘들은 모든 법문은 여기 선원에 모두 내려놓고 선원 문을 나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감을 통하여 얻어지는 모든 인식은 지식이 됩니다. 그것은 거울 위에 때가 끼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말하면 마음 거울 위에 지식이라는 앞선 먼지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거울의 때를 닦아야 하듯 정진이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먼지가 쌓여 원래의 맑은 거울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무명이요 業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먼지를 청소하는 가장 빠른 길은 좌선입니다. 그런 까닭에 항상 좌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매 순간마다 거울을 청소할 수 있다면 굳이 별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좌선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항상 맑은 거울과 같은 즉, 깨어있는 삶과 같은 순수의식을 유지관리 하는 첨단의 방편은 실상관법인 것입니다.
장미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느낄 때 우리는 항상 충만한 환희심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사실과 장미의 존재를 일체감으로 느낄 때 우리는 장미와 내가 일체동근(一切同根)임을 깨닫고 존재의 숭엄함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경계를 확장하여 만상은 우리자신과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낄 때 우주는 나와 하나인 것을 분명히 깨달은 순수의식이 될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사람은 의식이 굳어있는 사람입니다. 굳어있는 의식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따르므로 즉흥적이고 자발적이지 못합니다. 그는 지식을 통하여 모든 것을 조작하고 지식의 틀 안에 갇혀 지내므로 그는 매 순간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의 모든 반응은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며 그것은 그의 고정된 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사람은 기계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즉각적인 반응을 합니다. 이러한 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의 삶이며 순수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매순간 새롭게 태어납니다.
2. 수 행
수행의 지고한 목표는 마음에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무상에 이른 마음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가장 올바른 수행은 육신을 토대로 한 생체 에너지를 올바르게 증진시키는데 있습니다.
올곧은 정신력이 있어야 마음속에 드리워진 무명(無明))이라는 불확신의 그늘이 지워지게 됩니다. 호흡 즉, 들숨과 날숨간에 일어나는 잡다한 생각 에너지를 뇌 세포 한곳에 묶어 두지 않고 자신의 육신 구석구석으로 분산시켜 저장해두어도 배우고 익힌 것이 빼앗기거나 분산되지 않는다는 절대믿음에서 시작되는 생체에너지 운용이 선도리(禪道理)입니다.
믿음과 확신이 강할수록 무명이 엷어지면서 정체된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스스로 회전시킬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며 그로 인하여 정신 에너지가 차츰 맑아집니다. 맑게 다듬어진 정신 에너지가 일정한 대상에 묶여있지 않을 수 있는 단계로 잘 여물어지면 이때부터는 유.무위 법계로부터 끄달림이 없어지는 대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릇을 비워야 하는 과정에서 그릇의 때를 벗겨내고 새롭게 조성하기 위하여서는 시기 적절한 세제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필연적입니다. 그것은 1) 대 스승의 도리를 법으로 삼고 2) 자유에 이르렀던 역대 선지식들의 어록으로 내 마음의 율장을 삼아 3)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인륜을 토대로 계율을 삼아가면서 4) 인과에 묶이지 않는 실상관을 익혀 들어가면 바른 힘이 생겨나 점차 생사에 걸리지 않는 대자유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참 선법은 그 자체가 일상사(日常事)이며 주어진 생활 속에서 이루어 내는 나의 중도(中道)세계입니다. 자아가 일정한 틀에 묶여있지 않아도 자유스러울 수 있다는 중도성립이 되면 이것은 유.무위 법계의 논리로부터 해방되어진 결과입니다. 그 후 수행자는 기민하고 단호하며 근면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중생심(衆生心)에 묶여 있을 때와는 달리 생체 에너지가 자동적으로 평정을 이루는 것이며 그러므로 차츰 맑은 물과 같은 유순한 성품이 만들어집니다.
마음이 유하고 맑은 물과 같다는 것은 밝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거울은 세상 이치를 휜히 다 비추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설왕설래할 일이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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