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의 人間觀
이름 : 圓明 작성일 : 2000-09-22
첨부 파일 :


인간은 어떠한 동물인가? 역사적으로 많은 성현들과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성선설, 성악설, 원죄설 등 등 그 보는 시각이 다양하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관은 비교적 복잡한 편이다. 때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여 자아야말로 가장 존귀하고 유일 무이한 존재임을 강조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인간은 원래 없는(無我)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인간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축적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불교의 인간관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인간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불교에서 제시하는 4가지 인간관

1) 오온설: 오온설은 인간을 다섯 가지(색 수 상 행 식) 요소들의 축적물(蘊)로 구성된 복합체로 보는 관점이다. 색온은 우리의 몸을 가리키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거슬림" 즉 우리 내·외부의 몸에서 일어나는 감촉의 지속적인 축적을 의미한다. 수온(受蘊)은 느낌의 축적을 의미하고, 상온(想蘊)은 지적 판단을 통해 형성되는 정보의 축적을 의미하고, 행온(行蘊)은 하고자 하는 의지의 축적을 의미하며, 식온(識 )은 감촉을 바탕으로 형성된 느낌, 정보, 의지를 하나로 묶고 저장하며 이것을 자기라고 착각하는 의식작용의 축적을 의미한다. 이 의식작용은 색수상행 4가지의 요소에 뿌리를 내리고 욕탐이라고 하는 물질을 통해 지속적으로 증장 변화하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오온설에서는 인간을 외부의 요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의식작용의 변화과정에 지나지 안는다고 인식하는 부정적 인간관이다.

2) 유식설은 오온설을 좀더 확장한 인간관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작용은 지속적으로 아뢰야식에 축적된다. 이 축적된 의식작용의 결과물을 인간은 자기라고 착각하고 이에 집착하는 마음을 낸다. 그리고 자기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식 대로만 보려고 하며,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헤아려 취하려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이는 우리의 다음 생의 인으로 작용하여 윤회를 있게 하는 종자가 된다.
인간의 진정한 해탈은 이 아뢰야식의 완전한 정화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 유식설 또한 인간을 단지 업의 결과물로 보는 부정적 인간 이해 방식이다.

3) 무아설은 반야부의 공 사상을 중심으로 본 인간관이다. 반야심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오온설에서 이야기하는 색 수 상 행 식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 과정과 육근의 작용 그 모든 것은 없으며,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라고 본다. 모든 것은 원래 성주괴공하는 하나의 현상일 뿐 자성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현재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착각임을 강조하며, 인간의 본성은 공함 그 자체임을 지적하는 인간관이다.

4) 여래장설: 이는 인간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는 관점이다. 인간은 원래 깨닫지 못한 부처라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잘못 보고 있어서 그렇지, 인간은 있는 그대로가 부처요 보살이라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한 생각만 바꾸면 있는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본래 부처의 성품이 내재해 있고 그것이 지금도 끝임 없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낙관주의적 인간관이다.

2. 무아설의 의미

불교에서 보는 인간의 본성은 空이다. 여기서 공은 태허(太虛)로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무기성(無記性)을 의미한다. 공은 무엇이든지 가능한 대 자유 그 자체이다.
여기서 공을 氣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인연에 따라 정확하게 그 형상을 들어내며 작용할 수 있는 자유자재함 그 자체가 공성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본다. 삼라만상은 공 그 자체이기 때문에 지금도 스스로 그렇게(자연히) 성주괴공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이라고 함은 그 자체가 진리요 전 우주적 힘이 용솟음치는 무한한 가능성을 전재로 한 가장 여여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견성을 한다고 함은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고 전 우주적 에너지와 계합되어 순간 순간을 참되고 그 시공간에 적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순수성, 대 자유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의 회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무아라고 함은 무념(無念)이요 모든 집착을 떠난 진여공성과 계합된 인간의 모습을 바탕으로한 인간관일 것이다.

3. 두 가지 대립되는 인간관의 의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불교의 인간관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왜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가? 인간은 아직 자신의 주장과 업으로 인해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나온 중생이다. 이 중생의 삶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길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자신의 본성 회복을 위해 끝임 없이 수행하며 정진하는 깨침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 몸 받은 습인에 따라 자신의 분별심에 중심을 두는 생멸의 길이다.

1) 생멸의 길: 이는 삼독심에 끄달려 사는 범부 중생의 길이다. 이 길은 원래 인간 본성인 공(眞如)이 무명심과 연하여 출발한 길이다. 따라서 무명은 원래 공에서부터 출발한다. 무명으로 일어난 의식작용은 자신을 독립된 자아라고 착각하고 자기 집착심과 자기애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자신과 밖의 대상을 구분하고 밖의 대상을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은 취하고 불리한 것들은 멀리하려 끝임 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잠시 연기 과정을 통해 형성된 자신의 육신은 곧 연기과정을 통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생멸의 길 중심의 인간에 대한 설명이 곧 오온설이고 유식설의 입장에서 본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2) 깨침의 길: 깨침의 길은 생멸의 길에 큰 회의를 느끼고 바른 삶을 위해 몸부림 치며 공덕을 쌓아오다 홀연 인연을 만나 자신 속에 본성을 인식하고 수행의 길을 가는 삶의 모습이다. 이 깨침의 길은 인간만이 가진 이성적 작용을 통해 순간적으로 본성의 대 자유를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돈오이다. 이 돈오는 생멸의 길을 통해 구해온 모든 것들이 단지 자신의 의식이 지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감지하고 대분심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놓고 버리고 비우는 수행을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지속적인 점수를 통해 돈오의 영역은 확장되고 이는 좀더 수행을 지속하는 점수의 바탕이 된다. 수행이라고 함은 세상을 등지고 고행의 길을 가는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깨침의 길로 가는 참된 수행은 곧 본래 자기 본성과 계합되고자 아집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들어내면서 인간의 바른 길인 예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어디에도 기댈 바 없는 순간순간 가장 간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구경각(究竟覺)에 이를 때까지 즉 완전한 부처를 이루어 윤회의 틀에서 벗어 날 때까지 돈오와 점수의 반복적 작용은 지속된다고 본다. 이러한 깨침의 길을 가는 인간의 모습을 중심으로 볼 때 여래장설의 인간관이 될 것이다.

인간을 그 본래의 공한 성품으로 이해할 것인가, 생멸의 길에서 몸부림치는 중생의 측면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깨침과 그 가능성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인간관은 달라진다. 하지만 원래 인간의 본성은 공이요 그 진여가 본질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생멸의 길에 있는 중생은 단지 이 진여본성이 비본질적인 무명과 연을 맺게되어 잘못된 인식을 일으키고 그 본질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진흙탕의 생멸의 길을 가더라도 우리 인간의 진여본성에는 일획의 흠집도 없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간의 속에서 그 본래적 작용을 지속하고 있다. 인간은 생멸의 길에 빠지면 빠질수록 회의에 젖게되고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생멸의 길에서도 끝임 없이 인간 속에 진공묘유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다. 석가모니가 인류에게 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고 하면 인간에게 누구도 흩트릴 수 없는 진여본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기를 바로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멸의 길에서 묶여 있는 자기로부터 해방되어 전 우주의 중심이 되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전 글 수행일기를 쓸수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다음 글 삶의 지혜